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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에서 유일하게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은 브라질 원주민 본문
대부분의 아메리카 원주민은 북아시아 시베리아와 몽골에서 온 이주민이 베링 해협을 가로질러 북아메리카 서부 해안을 따라 유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브라질 원주민은 북서부에서 아마존강 유역을 건너온 시베리아 이주민의 후손으로 여겨집니다. 유럽인이 도착했을 당시 브라질의 영토에는 2,000개 이상의 국가와 부족이 있었습니다. 원주민은 전통적으로 사냥, 낚시, 채집 및 이주 농업에 의존해 살아가는 반 유목민 부족이었습니다. 수백 년 동안 브라질 원주민은 반 유목 생활을 하면서 그들의 필요에 따라 숲을 관리했습니다. 포르투갈 인이 1500년에 도착했을 때 원주민은 주로 해안과 주요 강둑을 따라 살고 있었습니다. 식민지 개척자들은 원주민을 인디언이라고 불렀습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동인도라고 생각한 곳이 바로 브라질입니다. 남아메리카의 다른 지역과 달리 브라질은 포르투갈의 식민지배를 받았습니다. 유럽인들이 브라질에 정착하면서 많은 부족이 사라지고 브라질 민족으로 동화되었습니다. 유럽인들의 이민이 늘어나고, 노예무역이 활발해지면서 그들의 문화적 신념에 변화가 생겼고, 인종 차별과 기후 변화와 같은 사회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포르투갈인은 북미 영토에 있는 스페인인처럼 질병을 가져왔고, 많은 인디언들은 면역력이 부족하여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갔습니다. 홍역, 천연두, 결핵, 인플루엔자로 인해 수만 명이 죽었습니다. 전염병 감염으로 죽어나가는 원주민의 수는 전쟁으로 사망하는 원주민의 수를 초과했습니다. 전염병은 토착 무역로를 따라 빠르게 퍼졌고, 유럽인과 직접 접촉하지 않았음에도 멸종하는 부족들이 다수 발생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원주민은 유럽으로부터 발병한 전염병으로 인해 죽어 나갔으며, 콜럼버스 이전에 최대 300만 개에 이르던 부족 수는 1997년에 30만으로 대폭 감소했습니다. 2010년에 실시된 인구 조사에 따르면 브라질 인구 중 단 80만 명 정도가 원주민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포르투갈은 원래 스페인의 일부였던 해양 강국이었습니다. 1093년 카스티야 왕국의 테레사 공주는 포르투 카 일레의 포르투갈 백작과 결혼하여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처음으로 분할했습니다. 1143년에 포르투갈이 공식적으로 설립되었습니다. 14세기경 유럽은 흑사병으로 약 2,400만 명이 죽어 나갔습니다. 포르투갈은 특유의 면역력으로 이 난국을 잘 이겨내서 흑사병 이후 더욱 강해졌습니다. 15세기, 포르투갈왕 주 아오 1세 시대에 항해와 탐험을 좋아했던 세 번째 왕자 헨리는 포르투갈 해군이 해외로 확장하여 국가를 식민지화하도록 허용했습니다. 포르투갈은 국부를 늘리기 위해 해외 식민지 정책을 수행했습니다. 식민지 중에서 흑인이 가장 많은 곳이 브라질이었습니다. 그 당시 아프리카 노예 거래는 가장 수익성이 좋은 사업 중 하나였기 때문에 브라질은 포르투갈에게 엄청난 매력과 잠재력을 지닌 곳이었습니다. 브라질은 식민지 개척자들이 1500년에 발견한 이후 포르투갈의 식민지였으며, 이는 원주민들에게 커다란 재앙이었습니다. 브라질 정복 이후 포르투갈 식민지 개척자들은 원주민에게 집약적 노동을 강요했고, 많은 원주민들이 집약적 노동의 결과로 죽었습니다. 포르투갈 식민지 개척자들은 원주민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사탕수수를 심고 금광을 개발하여 커다란 이익을 남겼습니다. 원주민들이 죽어나가면서 일꾼이 부족해지고 이는 남은 원주민에 대한 작업 부담을 가중시켰습니다. 억압적인 환경에서의 노예생활과 유럽 식민지 개척자들에 의한 첨단무기, 창궐하는 전염병으로 원주민의 인구는 크게 감소했습니다. 1500년 포르투갈이 도착하기 전에 브라질 해안 지역에는 두 개의 부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브라질 해안 대부분을 지배했던 투피족과 타푸이아족입니다. 포르투갈은 투피족과 타푸이아족 사이의 오랜 투쟁이 끝날 즈음 도착했는데, 그 결과 대부분의 해안 지역에서 타푸이아족이 패배하고 추방되었습니다. 해안의 투피족은 문화적으로나 언어적 측면에서 동질적이었지만, 서로 적대적인 하위 부족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초기 유럽인들이 브라질 해안을 따라 정복하면서 동일한 문화와 언어를 가진 사람들을 만났다는 사실은 원주민들과의 의사소통과 상호작용을 매우 수월하게 만들었습니다.
16세기 중반에 가톨릭 예수회 사제들은 포르투갈 군주의 명령에 따라 브라질 원주민을 천주교로 개종시키기 위해 식민지 개척자들과 함께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원주민의 문화를 유럽화하고, 종교를 천주교로 개종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예수회는 원주민들을 동일한 인격으로 대하고, 그들의 자유와 사유재산에 대한 권리를 가진 완전히 이성적인 인간으로 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770년대 중반에 포르투갈, 스페인, 바티칸 사이의 복잡한 외교 문제 때문에 예수회는 브라질에서 추방되었고, 선교사업은 강제로 철수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원주민의 자유와 재산권은 심각한 위협을 받았습니다. 1800년까지 브라질 식민지의 인구는 약 325만 명에 이르렀으며, 그중 원주민은 약 25만 명에 불과했습니다. 브라질에는 원주민 언어가 많이 있었습니다. 2010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브라질에는 305개의 부족이 있으며 274개의 언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각 언어를 사용하는 원주민은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가장 많이 사용되는 언어인 티쿤은 3만 명 이상이 사용합니다. 브라질 원주민 언어의 약 76% 이상이 실제 사용 인구가 1,000명 미만입니다. 단 몇 명만이 사용하는 언어도 있습니다. 그 결과 브라질은 세계에서 소멸 위기에 처한 언어가 가장 많은 국가 중 하나로 유네스코에 등재되었습니다. 브라질 정부는 문화적 다양성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원주민 언어 보호 정책과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