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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군의 학살로 최초의 무국적자가 된 원주민 키르케스족 본문
러시아인들은 키르케스족을 키르케시라고 부르는데, 이는 코카서스 북서부에 살고 있는 아디게 부족의 이름인 케르케티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입니다. 일부 민족주의 투르크 집단은 그들이 투르크족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산악지역에 사는 원주민 사회는 대부분 엄격한 피라미드형 신분 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장 높은 왕자 계급부터, 귀족, 평민, 농노, 노예의 계급을 철저히 지키는 사회였습니다. 키르케스어를 주로 사용했으며, 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거치면서 러시아어, 터키어, 영어, 아랍어 및 히브리어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러시아는 원주민의 언어를 말살하기 위한 노력을 많이 진행하였습니다. 1990년대까지도 원주민들은 비즈니스를 위한 표준어로 러시아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중세부터 원주민들 사이에 무슬림을 믿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1717년 무라드 4세 통치 시절에는 귀족계층을 강제로 이슬람으로 개종시켰습니다. 궁극적으로 귀족 계층의 가족과 지역으로 이슬람교를 전파하게 되었습니다. 이 지역의 점진적 이슬람화는 러시아의 침략을 용이하게 해 주었습니다. 오늘날 원주민 대부분은 무슬림이며, 기독교인은 소수입니다.
서기 3세기 이후 유럽지역에서 기독교는 아르메니아, 그리스, 비잔틴의 영향으로 코카서스 전역에 퍼졌습니다. 이 시기에 원주민들도 기독교를 국가 종교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지만 그들 고유의 전통 문화와 종교를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원주민들은 많은 나라를 건국했지만 정치적으로 완전한 통일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400년 경부터 외부로부터 수많은 침입이 있었습니다. 1,000년 말에 카자르 국가가 해체되면서 알라니아 왕국으로 통합되었습니다. 이후에는 조지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1223년에 몽골은 코카서스를 침공하여 키르케스족과 알란족을 유린하였습니다. 이어지는 골든호드의 공격으로 원주민들은 대부분의 토지를 빼앗기고, 쿠반강 뒤쪽으로 후퇴해야 했습니다. 1395년에 타머레인과 격렬한 전쟁을 치르고, 결국 승리를 거두었지만 원주민들은 약탈을 당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1400년대 아이널 왕자는 많은 국가로 나누어져 있던 타만 반도의 원주민들을 통합하기 위해 군대를 조직하고, 실제로 스스로를 왕으로 칭하며 부족들을 차근차근 정복해 나갔습니다. 이후 이날과 그의 지지자들은 북부 압하지야를 정복하고 원주민들의 공식적인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1453년에는 이날의 아들과 손주들에게 지역을 분할해서 나누어 주고, 그는 1458년에 사망했습니다. 그의 사후 이 지역에는 키르케스 공국이 세워졌습니다.
17세기에 크리미아 타타르와 오스만 제국의 영향으로 수많은 원주민들이 기독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였습니다. 1708년에 타타르는 원주민의 중심부까지 공격을 했으나 오스만 제국의 술탄은 원주민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원주민들은 술탄을 지배자로 인정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에 술탄은 크림 군대를 보내 원주민들을 공격하였으나 예상과 달리 거센 원주민들의 저항으로 전투에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1708년 9월 17일 크림 군대는 대패하여 크림 칸이 간신히 목숨을 구하는 굴욕을 당했습니다. 1714년 피터 1세는 코카서스를 점령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습니다. 피터 1세가 세워 놓은 계획을 토대로 캐서린 2세는 테렉강 유역에 군대를 배치하여 공격을 감행하였습니다. 이 전쟁으로 18세기 후반에 원주민들은 북부 영토의 대부분을 빼앗겼습니다. 러시아는 지역마다 요새를 건설하였지만 이 요새들은 원주민들에게 항상 공격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원주민들은 수시로 요새를 점령하고 그에 대응하여 러시아는 보복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러시아군은 원주민 저항군이 숨어 있다고 생각되는 마을을 파괴하고 주민들을 납치하고, 저항군을 암살하거나 그들의 가족을 처형하였습니다. 저항군들은 원주민 마을에서 음식을 지원받았기 때문에 마을의 작물과 가축 또한 모두 소각되었습니다. 원주민은 지역의 모든 부족을 포괄하는 부족 연맹을 만들어 대응했습니다. 1840년 칼 프리드리히 노이만은 원주민의 사망자 수를 전체 주민의 절반이라고 추정하였습니다. 후에 역사학자들은 이 사건을 키르케스의 학살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원주민은 1861년 6월 25일에 수도인 소치에서 위대한 자유연합이라는 의회를 만들었습니다. 이 의회는 러시아군의 퇴각을 요구했고, 유럽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유럽이 화답하기도 전에 러시아 장군 콜료 바친은 소치를 침공하여 의회를 해산시켰습니다. 그 어떤 유럽의 나라도 이 같은 조치에 반대하지 못했습니다. 1864년 5월, 2만 명의 원주민 기병으로 구성된 군대와 10만 명의 병력을 갖춘 러시아와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러시아 군을 공격하고 여러 경로로 침입을 시도하였으나 러시아의 포병과 보병에게 번번히 무너졌습니다. 원주민은 계속 패배를 거듭했고, 2만명에 이르는 원주민의 기병은 전쟁에서 전멸하였습니다. 1864년 5월 21일, 러시아는 전쟁의 승리를 공식적으로 축하하였습니다. 원주민이 사는 지역을 흐르는 강은 전쟁이 끝나고도 꽤 오랫동안 빨간 피가 흘렀다고 합니다. 이후 러시아 정부는 원주민들을 추방하는 법을 통과시키고, 민간인 수천명을 학살하고 마을을 초토화 시켰습니다. 그들을 거주지에서 완전히 몰아내서 흑해 연안으로 쫓아냈습니다. 약 90%가 넘는 원주민들이 오스만 제국으로 추방당했습니다. 1864년 기준 원주민 전체 인구의 4분의 3이 사라지고, 그들은 나라를 잃은 최초의 무국적자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