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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주의 명목하에 차별과 핍박을 받은 호주 원주민 어보리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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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주의 명목하에 차별과 핍박을 받은 호주 원주민 어보리진

순수보라 2021. 4. 6. 20:39

호주 원주민은 영국 식민지 지배 이전에 호주에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토레스 해협 섬을 제외한 호주 본토 및 관련 섬의 원주민과 토레스 해협 섬 주민이 포함됩니다. 1980년대 이후로 사용되고 있는 이 용어는 정체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이유로 많이 사용되지 않습니다. 최근에는 초기 원주민, 초기 사람들 또는 초기 호주인이라는 용어가 더 보편화되어 있습니다. 그중 초기 원주민이라는 용어가 가장 수용할만하다고 여겨집니다. 원주민이라는 단어는 16세기부터 Ab(원산지)와 Origo(원산지, 시작)에서 파생된 라틴어 Aborigines(어보리진)에서 유래되었으며, 최초 또는 초기에 알려진 토착민을 의미합니다. 어보리진은 1789년부터 원주민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면서 현재는 원주민과 토레스 해협 섬 주민들을 공통으로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습니다. 원주민 집단들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이 있지만, 매우 다양한 문화, 관습 및 언어가 혼재되어 있습니다. 초기 유럽인이 정착할 당시에는 250개 이상의 원주민 언어가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현재는 약 120~ 45개가 계속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13개 언어는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오늘날 원주민은 대부분 영어를 사용하며, 원주민의 문화를 반영하기 위해 원주민 문구와 단어가 추가되기도 합니다. 토레스 해협 섬 주민은 본토 원주민과 다른 전통문화와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동부 토레스 해협 섬 주민들은 파푸아 뉴기니 민족과 유사하며, 파푸아 언어를 사용합니다. 이런 이유로 원주민에 포함시키지 않습니다. 토레스 해협 섬 주민들의 특성 때문에 단순히 원주민이 아닌 "호주 원주민"이라는 포괄적인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합니다. 원주민의 6%는 스스로를 토레스 해협 섬 주민이라고 밝힙니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다른 4%는 자신이 토레스 해협 섬 주민과 원주민 문화를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토레스 해협 섬은 약 100개 이상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고, 1879년 퀸즐랜드에 통합되었습니다.

영국의 호주 식민지배는 1788년 뉴 사우스 웨일즈의 보타니 베이에 제1함대가 도착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후에 1803년에 태즈 매니아와 빅토리아에, 1824년에 퀸즐랜드, 1826년에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 1836년에 사우스 오스트레일리아에 식민지배를 위한 정착지가 설립되었습니다. 북부지역의 첫 번째 정착지는 고든 브레머 대장이 배서스트와 멜빌의 티위 제도를 점령한 후 지어졌습니다. 호주는 북미와 뉴질랜드의 경우처럼 유럽계 정착민과 원주민 사이에 합의 조건을 설정하는 조약이 작성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영국 제국의 식민지 지배 관행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1862년에 토레스 해협의 경찰 치안 판사인 존 자딘을 행정책임자로 임명하면서 토레스 해협 제도의 행정 통제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원래 알바니 섬에 작은 정착촌을 세웠지만 1864년 8월 1일 소머셋 섬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1871년 7월 1일 영국 선교사들이 에럽에 도착했습니다. 1872년 퀸즐랜드의 경계는 퀸즐랜드 해안에서 97킬로미터 이내에 있는 토레스 해협의 섬들을 포함하도록 규정하였니다. 그리고 1879년 퀸즐랜드는 다른 섬을 합병하여 영국의 퀸즐랜드 식민지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유럽인과 최초로 접촉하기 시작한 1788년 인구는 314,000명으로 추정되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남동부의 머레이 강을 따라 살고 있었습니다. 최근에 발견된 자료에 따르면 당시 인구는 50만 명~1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 다른 연구에 따르면 500년 전의 원주민 인구가 120만 명을 넘었지만, 지난 500년 동안 유라시아에서 발병한 전염병으로 인해 대폭 감소했을 수도 있다고 추정됩니다. 유럽인이 도착한 후 홍역 , 천연두 및 결핵과 같은 유럽에서 발병한 전염병이 확산되면서 원주민의 인구가 크게 감소하였습니다. 19세기에는 천연두가 원주민 사망의 가장 큰 원인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184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원주민에 대한 예방 접종이 시작되었습니다. 1789 년에 발생한 천연두 전염병으로 원주민의 90%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천연두 발병 원인에 대한 이견은 있지만, 많은 학자들은 유럽으로부터의 전염병을 가장 큰 이유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유럽인들의 강간과 원주민 여성과의 매춘이 증가하면서 성병, 특히 매독과 임질로 죽어가는 원주민 여성이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2016년 6월 30일을 기준으로 조사한 원주민의 인구는 798,365명으로 호주 전체 인구의 3.3%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19세기와 20세기 동안 원주민과 토레스 해협 섬 주민은 다양한 보호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잃었습니다. 원주민은 같은 일을 하면서도 유럽인보다 더 적은 임금을 받았습니다. 실제로 원주민들은 자신의 집에서 납치되어 태평양 섬으로 팔려간 끔찍한 식민지 노예제도의 희생자들이었습니다. 1860년에서 1970년 사이에 원주민을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12세의 어린이를 포함한 원주민들은 끔찍한 환경에서 일하고 대부분 임금을 받지 못하면서 일해야 했습니다. 특히 원주민의 폐는 더 큰 폐활량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어 그들은 노동력 착취를 당하였습니다. 1810년부터 교회와 정부가 운영하는 선교국에서 원주민들을 관리했습니다. 그들은 음식과 피난처를 제공하는 대신 원주민을 기독교로 개종시켰습니다. 원주민을 유럽인들과 분리하고 통제하는 것을 목표로 한 보호주의 정책을 끝내고, 1937년 연방정부는 동화정책을 실시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이로서 원주민에 대한 차별을 최소화하고 원주민을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백인 공동체에 통합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정책의 실시로 본인의 집에서 강제로 퇴거당하고 백인들과 함께 시설이나 위탁 가정에 배치되는 아동의 수가 증가했습니다. 식민지화 과정에서 대륙과 섬에 걸쳐 식민지 정착민과 원주민 및 토레스 해협 섬 주민 사이에는 많은 소규모 갈등과 충돌이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식민지 개척자들과 원주민 및 토레스 해협 섬 주민의 저항운동이 항상 있었습니다. 1938년에 100명 이상의 원주민이 시드니에서 원주민 회의를 소집하고, 그 날을 시위와 애도의 날로 표시함으로써 처음으로 정부에 항의를 시작하였습니다. 이날은 원주민들은 생존의 날 또는 침략의 날이라고 부릅니다. 1963년 그들은 광산 개발권에 항의하기 위해 정부에 나무껍질로 된 청원서를 보냈습니다. 이것은 영국 연방법에 따라 인정되는 원주민의 전통 문서였습니다. 1972년 호주의 날에 원주민 활동가들은 원주민 토지 소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국회 의사당 잔디밭에 텐트 대사관을 세웠습니다. 텐트 대사관은 1995년에 유산으로 지정되었고, 2012년에 40주년을 맞이하여 세계에서 가장 길고 소리 없는 시위 캠프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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