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드센스 1000달러 파이프라인
에스키모라 불리던 캐나다 원주민 이누이트족 본문
이누이트는 캐나다의 원주민으로 1100년대에 그린란드로부터 캐나다로 유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미국과 덴마크에서는 에스키모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 캐나다와 그린란드 이누이트의 일부 원주민들은 에스키모를 공격적인 용어로 간주하고, 대신에 이누이트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1100년대에 이누이트 이민자들이 캐나다에 정착하기 시작하였고, 서쪽으로는 그린란드에도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2세기에 이르러서는 동부 그린란드에도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주변 지역의 다른 부족으로 인해 완전히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이는 1950년대 중반에 실시된 연구원 헨리 B. 콜린스가 발견한 유적을 기반으로 조사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원주민들이 1900년 초반까지 살아 있었으나 그 이후 유럽인과의 접촉이 증가하면서 전염병으로 많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누이트의 후손은 1900년대 중반까지 전통적인 반유목 생활 방식을 계속했습니다. 일반적으로 계절에 따라 섬과 만 사이를 이동했습니다. 그래서 고정된 공동체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남쪽 지역에서는 이누이트가 아닌 다른 원주민 문화가 번성하고 있었습니다. 이누이트 사회의 문화와 기술은 북극 지역에는 적합하지만 남쪽 지역에는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쪽에는 살지 않았습니다. 남쪽에 살지 않는 대신 이누이트는 더 많은 남쪽 지역의 원주민들과 문화적인 교류를 하고 무역 관계를 강화하였습니다. 그들 사이의 영토 경계에 대한 분쟁은 빈발하게 일어났고 이는 과격한 행동을 이어지곤 했습니다. 충분한 규모의 이누이트 그룹 사이에서의 전쟁은 흔하게 일어났습니다. 특히 매켄지강 삼각주 지역에 살았던 누나 미 우트와 같은 이누이트는 전쟁을 많이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북극 중앙 부분에 정착한 이누이트들은 전쟁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외부인을 처음으로 접촉한 것은 캐나다 동부 해안을 탐험하러 온 바이킹을 만난 것이었습니다. 이 지역은 약 1350년 이후 소빙하기로 알려진 기간 동안 더 추워졌습니다. 이 기간 동안 알래스카 원주민은 포경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높은 북극에 사는 이누이트는 캐나다와 그린란드로부터 북극 고래가 사라지면서 사냥과 포경 활동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포경 활동을 하지 못하면서 이누이트는 훨씬 더 가난해지게 되었습니다. 변화하는 기후로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서 이누이트는 남쪽을 따라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그 지역은 다른 부족이 점령하지 않았거나 이누이트가 살기에 충분히 좋은 지역이었습니다. 이누이트족이 17세기에 처음으로 유럽 식민지 개척자들과 교류하기 시작했을 때 남부 래브라도의 새로운 영토로 이동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북극의 팔 레오-에스키모 인의 삶은 상호 무역을 제외하고는 북유럽인들의 유입에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래브라도 지방에 사는 이누이트들만이 유럽인과 가장 오랫동안 접촉을 하였습니다. 이후 이누이트는 적어도 몇 세기 동안 유럽인들과 접촉이 없었습니다. 16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바스크 고래잡이와 어부들이 래브라도 해안에서 일하게 되었고, 래브라도의 레드 베이에서 발굴된 것과 같은 포경 기지를 육지에 설립했습니다. 이누이트는 겨울철에 기지를 급습하여 철로 만든 도구와 아이템을 가져다 본인들의 생활방식에 맞게 잘 활용하였습니다. 1576년이 되어서야 유럽인과 이누이트 간의 빈번한 교류가 발생하였고, 문서로 잘 정리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유럽인들의 탐험으로 배핀섬에 도착했고, 선장의 명령에 따라 5명의 선원이 배를 떠나 현지 이누이트를 만났습니다. 모험에 지치고 향수병을 앓던 선원들은 유럽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일부 이누이크들을 강제로 데려가기도 했습니다. 반 유목민 생활을 하던 이누이트는 호수, 바다, 빙하 및 툰드라에서 물고기를 잡고 사냥하는 어부와 사냥꾼이었습니다. 18세기 말에 모라비아 교회는 포경 기지의 급습에 지친 영국의 지원을 받아 래브라도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선교사들은 포경 기지에서 가져온 철과 재료들을 이누이트에게 제공하였습니다. 이는 유럽인들에게 큰 비용이 들지 않았지만 이누이트에게는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래브라도 지역의 유럽인과 이누이트 간의 교류는 훨씬 더 평화로웠습니다. 유럽인들의 도착과 식민지화를 수반한 교류는 이누이트의 삶의 방식을 크게 변화시켰습니다. 고래잡이와 탐험가들로부터 옮겨온 새로운 전염병으로 인해 많은 원주민들이 사라졌으며, 이는 원주민이 새로운 질병에 대한 충분한 면역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20세기 초에 소수의 상인과 선교사들이 이누이트와 교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04년 이후 그들은 소수의 부족들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캐나다의 다른 원주민과 달리 이누이트는 유럽 정착민들이 탐내는 땅을 차지하지 않았습니다. 더 온화한 기후와 조건에 익숙한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이누이트의 고향을 탐내지 않았습니다. 남부 사람들은 북부 주민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그곳을 방문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정착지가 늘어나면서 캐나다 정부와 기업가들은 이누이트의 고향보다 주변 지역, 특히 모피와 광물이 풍부한 배후지에 더 큰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1920년대 후반에 모든 이누이트는 상인, 선교사 또는 정부 요원과 최소 한 번이라도 교류를 하게 되었습니다. 1939년에 캐나다 대법원은 Re Eskimos로 알려진 판결에서 이누이트를 인디언으로 간주하고 연방 정부의 관할권에 있음을 선언했습니다. 이후 원주민 사회의 규칙을 무시하고 캐나다 형법에 따라 모든 것이 통제됨에 따라 원주민의 관습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개신교 선교사들이 이누이트 전통과 전혀 다른 도덕규범을 설교하고, 의식체계를 바꿔 기독교로 개종하도록 종용하였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과 냉전으로 캐나다 북부 지역이 강대국들에게 전략적으로 중요하게 인식되었습니다. 지금은 항공기의 개발로 이 지역으로의 접근이 매우 쉬워졌습니다. 1940년대와 1950년대에 공군기지와 원거리 조기 경보선의 건설로 유럽 사회와의 접촉이 빈번해졌습니다. 원주민들은 캐나다의 교육이 이누이트 사회의 전통적 구조와 문화를 경멸하고 대신 이국적인 가치를 장려했다고 불평하였습니다. 1950년대에 캐나다 정부는 여러 가지 이유로 북극 지역에 대한 집중적인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북극에서의 캐나다 주권을 보호하고, 기아를 해결하고, 원주민의 동화 작업과 동시에 전통적인 이누이트 문화의 종말을 추구함으로써 에스키모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하였습니다. 1950년대에 캐나다 정부는 이누이트를 별도도 마을과 도시에 적극적으로 정착시키기 시작했으며, 때로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정착시켰습니다. 2005년 캐나다 정부는 이러한 강제 정착의 문제를 인정했습니다. 북극 생활의 중심이었던 유목민 이주는 이후 많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극도로 혹독한 환경에서 자급자족했던 이누이트 족은 2세대에 걸쳐 더욱 빈곤층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판매할 기술이나 자원이 부족해서 스스로 경제생활을 하지 못하고 생존을 위해 캐나다 정부에 점점 더 의존하게되었습니다. 많은 인류학자들이 이누이트 문화의 멸종을 예측했지만, 이누이트 문화에 관한 부활 활동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