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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로네시안의 기원으로 추정되는 대만 원주민

순수보라 2021. 4. 7. 11:18

대만 원주민으로 알려진 포모사 사람들은 유전학적으로 오스트로네시아인과 비슷하며, 한족 이전에 상대적으로 고립된 상태로 약 5,500년 동안 대만에서 살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후 중국 본토로부터의 이민은 17세기에 시작되었습니다. 대만은 필리핀, 미크로네시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동 티모르, 마다가스카르, 폴리네시아에 영향을 미친 오스트로네시아인의 기원지이기도 합니다. 원주민들은 대부분 험준한 중앙산맥을 따라 펼쳐진 평원을 따라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물론 현대의 원주민들은 도시에도 많이 살고 있습니다. 현대 인류학자들은 원주민 부족을 20개가 넘는 부족으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공식적으로 2014년 6월 기준 16개 부족만이 남아 있는 것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원주민 부족 중 9개는 1945년 이전에 일본 정부에 의해서 인정 받았습니다. 타오, 칼라반, 트루쿠 부족은 각각 2001년, 2002년과 2004년에 대만의 정부에 의해 인정 받았습니다. 아미스 부족은 사카자야라는 이름으로 2007년 1월 17일에, 아타얄 부족은 세디크라는 이름으로 2008년 4월 23일에 각각 대만의 13번째, 14번째 공식 부족으로 인정 받았습니다. 흘랄루아 부족과 카나카나부 부족은 2014년 6월 26일에 15번째 및 16번째 부족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원주민은 지속적으로 원주민의 혈통, 역사, 언어 및 문화적인 자료 수집을 통해 정부의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노력중입니다. 또한 관광객의 유치를 통한 원주민의 경제적인 지원과 문화적인 부흥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대만 정부는 원주민 부족 중 카발란과 사키자야 부족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고, 나머지 부족들은 통틀어서 산악 원주민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많은 원주민 부족들이 원주민의 지위 회복과 문화 보존을 위해 정부에 지속적으로 청원을 하고 있고, 2018년 5월에 시라야 부족의 지위 인정에 관한 법원 결정이 나면 17번째로 인정받는 부족이 될 것입니다.

19세기 후반에 청나라가 원주민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면서 청과 대항하기 위해 산으로 들어간 사람들을 핑푸(고산민족)라고 불렀습니다. 일본 제국시대(1895년~1945년)에는 그들을 페이포라 부르며 식민지 정책에 적극 활용하였습니다. 중국 국민당 통치시대 초기에는 샨디 통바오와 핑디 통바오라는 용어로 일본의 잔재문화를 청산하고 중국의 문화를 반영하였습니다. 최근 인류학 분야의 변화와 정부 목표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핑푸와 가오샨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청의 문화를 계승한 영향으로 보여집니다. 현재 남아있는 원주민은 모두 가오샨으로 불리며, 엄격한 지리적 위치에 기반한 것은 아닙니다. 핑푸족은 대만 정부의 원주민 정책에 지속적으로 참여하여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수세기 동안 원주민들은 식민지 개척자들 지속적으로 경제적, 군사적으로 갈등을 겪었습니다. 식민지 개척자들은 중앙집중식 강제 정책을 통해 원주민의 언어문화와 생활문화를 없애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원주민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26가지 정도였는데 지금은 몇 가지 남지 않은 것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대부분의 언어학자들은 대만이 오스트로네시아 어족의 기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대만 언어는 독특한 역사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주민은 적절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생계를 위한 직업을 가지지도 못하고 있어 사회 내에서 경제적, 사회적으로 많은 피해를 보고 있습니다. 1980년대 이후 원주민 공동체 자체적으로 정치적인 권리를 찾고, 경제발전을 위해 부단 노력해 왔습니다. 전통문화에 기반한 문화를 부흥하고, 전통언어를 보존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타이 둥시의 오스트로네시아 문화 축제에서는 원주민 문화를 홍보하는 별도의 행사를 진행합니다. 또한 원주민의 경제적인 자립을 돕고, 전통 문화 보존을 목표로 관광 및 생태관광 산업에 참여를 유도하고 있습니다.

다른 원주민과 마찬가지로 대만의 원주민들도 다른 사회와의 접촉 및 신기술의 도입으로 인한 문화적인 변화를 겪었습니다. 17세기 초에는 유럽과 아시아가 서로 경쟁하는 식민지 정권의 지배에 따라 세계 경제 속에서 엄청난 문화적 변화에 직면하였습니다. 일부는 식민지 영향력에 강하게 저항했지만 대부분은 식민지 문화에 쉽게 동화되어 갔습니다. 이런 식민지의 영향력으로 집단 문화, 결혼과 연령 및 출산과 관련된 사회적 금기 사항이 많이 완화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원주민들을 문명화하기 위한 프로젝트들이 시행됨에 따라 외부문화와 더욱더 빈번하게 접촉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외부문화에 적응하고 동화되는 과정에 따라 원주민 고유의 전통문화가 사라지게 되었으며, 유교적 문화관습을 바꾸어 놓기도 하였습니다. 대만 북의 호클로 한 부족은 외부와의 접촉이 매우 제한되어 순수혈통으로만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형태의 동화정책은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중앙정부가 원주민의 언어를 대표언어로 바꾸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많은 경제적, 사회적인 혜택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이런 정책으로 세대가 지나면서 원주민의 언어는 사라지게 되고, 언어에 담긴 문화적인 정체성도 따라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원주민 공동체 대표들은 부족 고유의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대만의 원주민 동화정책에 대한 3가지 가설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17세기에 푸젠과 광동으로부터 이주해온 한족이 원주민을 산으로 쫓아내서 오늘날의 고원 민족이 되었다는 주장입니다. 두 번째는 17세기와 19세기 사이에 한족과 원주민 사이의 적극적인 결혼 정책을 통해 완전히 중국화가 되었다는 주장입니다. 마지막으로 한족과 원주민이 각각 경험한 문화들이 자연스럽게 혼합되면서 하이브리드 문화가 탄생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설들로 인해 오늘날 대만의 한족과 본토의 한족은 서로 다른 문화적인 차이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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