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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문화말살 정책의 희생양이 된 사할린 원주민 아이누족 본문
아이누는 신을 의미하는 카무이와 반대로 인간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아이누족은 홋카이도, 사할린과 쿠릴열도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농업생활뿐만 아니라 사냥, 낚시 및 채집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와세다 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원주민의 조상은 일본이 침략하기 훨씬 이전에 홋카이도 북부의 독특한 구석기시대 부족과 오호츠크 부족의 조합으로 조몬시대 말기에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이후에 그들은 캄차카 반도와 혼슈로 이주하였습니다. 아이누어를 사용하는 사냥꾼과 어부들이 홋카이도 북부에서 혼슈로 이주하였다는 근거는 서해안과 도호쿠 지역에서 발견되는 유물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9세기 초에 일본에 아이누를 침입하였습니다. 초기 정착자들은 일본어를 잘하지 못했습니다. 1264년에 그들은 니브족의 땅을 침략했습니다. 이어서 아무르족의 정착지로 원정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원나라의 지배를 받았고, 사할린을 침공한 몽골인들의 지배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 후 오랜 시간 동안 아이누족은 일본의 정복 대상이었습니다. 1456년에 일본과 아이누 사이의 분쟁은 코샤 메인의 반란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다케다 노부히로는 아이누 지도자 코샤 메인을 살해하였습니다. 에도 막부 시대에는 원주민에 대한 통제권이 강화되어 일본과의 무역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는 아이누와의 거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기간 동안 원주민과 빈번하게 접촉이 이루어지면서 일본 상인들의 권리가 강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일본 상인들과의 접촉이 늘어나면서 천연두와 같은 전염병으로 많은 원주민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교역의 증가로 상호 간의 이익 창출에 기여하였지만, 때로는 1669년 아이누 반란처럼 폭력적인 사태가 발생하기까지 했습니다. 이 시기에 가장 큰 사건은 일본 권위에 대항한 샤쿠샤인의 반란이었습니다. 그 이후의 큰 반란은 1789년 메나시-쿠나시르 전투였습니다. 1799년부터 1806년까지 막부는 홋카이도 남부를 직접 장악했습니다. 아이누 남자들은 강제로 상인들과 5년 이상 근무하도록 보내졌습니다. 그러나 원주민들이 모국어와 문화를 버리는 조건으로 음식과 의복을 지원하였습니다. 아이누 여성들은 남편과 강제로 헤어지고, 일본 상인과 어부들과의 결혼을 강요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내를 홋카이도로 데려가는 것은 금지되었습니다. 원주민 여성들은 새로운 일본인 남편의 강간에 저항하여 고문을 당하거나 산으로 도망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비인륜적 가족 분리와 강제 동화정책으로 원주민의 인구는 감소하기 시작하였고, 19세기 초에는 천연두의 영향이 가세하면서 인구는 더 큰 폭으로 감소하였습니다. 원주민의 인구가 18세기에는 8만 명 정도였습니다. 1868년 홋카이도에는 약 1만 5천 명, 사할린에는 2천 명, 쿠릴열도에는 100명 정도의 원주민이 살고 있었습니다. 1868년 메이지 유신 시대에 원주민의 문화는 많이 바뀌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국가를 현대화하기 위해서 서양의 다양한 사회, 정치 및 경제제도를 도입하였습니다. 또한 빠르게 발전하고 확장하는 러시아를 견제하고, 사무라이 계급의 실업문제를 해결하고, 자본주의 경제에 필요한 천연자원을 개발하기 위해서 홋카이도를 합병하게 되었습니다. 1899년에 일본 정부는 아이누족을 일본 국민으로 동화시키기 위한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그로 인해 원주민들의 땅을 강제로 점령하고, 일본의 통제하에 두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원주민들에게 일본 국적을 부여하였습니다. 원주민들은 고향을 떠나 살게 되었으며, 30년 정도가 지나면서 일본의 문화, 언어 및 종교에 완전히 흡수당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이러한 조치로 원주민이 살고 있는 섬의 풍부한 천연자원을 활용할 수 있었고, 이 지역에 서양 농업의 대표적인 모델인 농장을 만들고 유지하였습니다. 일본이 사할린을 정복한 이후에 사할린에 사는 아이누족에게도 동일한 법이 적용되었습니다. 2008년 6월 6일 일본 정부는 아이누족을 홋카이도 원주민으로 인정하고, 부족에 대한 차별을 없애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결의안에 따라 원주민들은 독특한 언어, 종교 및 문화를 가진 원주민으로 인정받았습니다. 2019년 2월, 일본 정부는 헌법 제14조에 의거하여 아이누를 원주민으로 공식 인정하는 법안을 통과시켜 일본 국민으로서의 법적 지위를 인정하였습니다. 2019년 4월 통과된 법안에 따라 홋카이도의 아이누족 또한 일본 원주민으로 공식 인정하였습니다.
1875년 상트 페테르부르크 조약으로 쿠릴 열도에 살고 있는 아이누족은 러시아와 일본으로 나누어졌습니다. 1877년 9월 18일 러시아의 지배를 받는 83명의 원주민은 페트로 파블로브스키-캄차츠키로 이주하였습니다. 1881년 러시아의 새로운 보호구역으로 이주를 거주하고, 야빈 마을에 정착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2015년 현재 러시아에서 가장 큰 원주민 집단은 북부 쿠릴 아이누족이고, 가장 작은 집단은 페트로 파블로브스키에 거주하는 6명이 전부인 나카무라 부족입니다. 사할린 섬에는 수십 명의 원주민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본토에 거주하는 888명의 일본인은 일본인과 원주민의 혼혈입니다. 쿠릴 열도에 사는 원주민들은 일본인과 러시아인 모두 침략자라고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