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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강국으로 번영을 누렸던 오키나와현 원주민 류큐족 본문
류큐족은 류큐제도의 섬과 대만 지역에 사는 원주민으로 현재는 일본 내 오키나와현과 가고시마현에 많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류큐어와 방언 또는 일본어를 사용합니다. 류큐족은 야마토족과 유사한 하위 부족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부족이 아닙니다. 2021년에 유전학 및 형태학적 분석을 한 결과 류큐족은 일본 야마토족보다 큐슈, 시코쿠, 혼슈 등 남부의 조몬족과 유사하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들의 조상인 남부 조몬족은 인류학적으로 현대의 동아시아인과 가장 유사하며, 홋카이도의 조몬족과는 상당히 달랐습니다. 류큐 열도에는 약 3만 년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지만 현대 류큐족과의 관련성은 불확실합니다. 공식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오키나와현에만 약 140만 명의 원주민이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약 80만 명의 원주민과 그 후손들이 하와이와 브라질 등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수 세기 동안 고립된 섬에서 살았고, 14세기에 류큐왕국으로 통합되어, 1372년에는 중국 명나라와 활발한 해상무역을 하였습니다. 1609년에는 도쿠가와가 규슈를 거점으로 하는 류큐왕국을 침공하여 중국과의 직접무역을 금지시켰습니다. 메이지 시대에는 류큐 번이 되었다가 이후 일본제국에 정치적으로 통합되었습니다. 1879년에는 오키나와현으로 편입되었고, 왕국의 마지막 왕인 쇼타이는 도쿄로 강제 추방되었습니다. 1895년 중국이 섬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하면서, 일본은 류큐를 야마토족의 문화로 동화시키려는 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메이지 정부는 류큐의 민족 정체성을 혼란시키고, 전통문화를 억압했습니다. 1945년과 1950년 사이에 발생한 세계대전과 1950년과 1972년 사이에 미국의 점령으로 많은 인권 침해를 받았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류큐족은 일본 정부와 오키나와 주둔 미군 시설에 대해 강한 분노를 표명했습니다.
이 섬은 7세기에 이르러서야 중국인과 일본인에게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수양제는 황실의 전통에 따라 607년 경에 행복한 불멸의 땅을 찾아 이 섬까지 왔습니다. 중국의 사절들은 섬 주민들과 언어적인 문제로 서로 소통할 수 없었고, 섬 주민들은 그들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중국 사절들은 주민들을 본토로 강제 송환하였습니다. 일본이 소유권을 확보한 이후에 이 섬은 일본어로 류큐라 불리었습니다. 616년 일본 역사에서 처음으로 그들을 남쪽 섬 사람들로 묘사되었습니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이 섬을 강제로 침입하였으며, 698년에 일본 정부가 파견한 소규모 군대가 다네지마, 야쿠시마, 아마미, 도쿠노시마 및 기타 섬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일본 서기에는 8세기 초에 여성 족장이 하야토 남쪽 큐슈 지역을 다스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699년에는 아마미 섬과 토카라 섬, 714년 신가키 섬과 쿠메섬을 공격하였습니다. 720년에는 약 232명이 일본의 침입에 항복했고 마침내 753년에 오키나와에 복속되었습니다. 1272년과 1274년 사이에 오키나와는 두 차례에 이르는 몽골의 침략을 막아냈고, 에이소의 통치기간에는 불교를 도입하였습니다. 1372년에는 사토의 사절단을 오키나와로 보냈으나 성과를 보지 못했고, 1374년에는 중국 명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었습니다. 중국의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자체적인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1392년에는 조선왕국에 광범위한 사절단을 보내기 시작했고, 1403년에는 아시카가 막부를 통해 일본과의 공식적인 관계를 맺었습니다. 1409년에는 태국 시암과도 접촉을 시도했고, 1425년에는 팔렘방, 1428년에는 자바, 1430년에는 말라카, 1463년에는 수마트라와 계속 접촉하였습니다. 1371년 중국이 일본과 해상무역을 금지하면서 류큐는 중간에서 일본과 중국의 무역 중개자로서 많은 이득을 얻었습니다. 말, 유황, 조개껍질을 중국으로 보냈고 중국에서 도자기, 구리, 철을 가져와 일본에 팔았습니다. 동남아시아에서 주석, 상아, 향신료, 목재를 구입하여 일본, 한국, 중국에 팔았습니다. 1392년에는 오키나와 정부가 푸젠에서 36명의 중국인 가족을 모셔다 나하 항구 근처에 거주처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외교관, 통역사 및 공무원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1416년과 1429년 사이에 쇼 하시는 류큐 섬에 왕국을 건설하고 해양 무역을 통해 번영을 누렸습니다. 일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집권하면서 류큐 열도에 대한 침공이 시작되었습니다. 1592년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면서 남긴 서신에 보면 류큐를 일본의 영토로 주장한 부분이 나옵니다. 중국 지역의 혼란으로 인해 명나라의 영향력이 약해졌고, 일본은 동남아시아 지역을 차지하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무역의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왕국의 해외무역이 감소하기 시작했습니다. 1603년 도쿠가와 막부의 최초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중국과의 무역을 허용하는 대신 막부의 명을 받을 것을 지시하였습니다. 이에 아무런 반응이 없자 1609년 도쿠가와는 류큐를 침공하여 일본의 영토로 통합시켜 버렸습니다. 1868년 메이지 시대에 류큐 왕국을 가고시마현 최남단에 포함시키고, 일본의 행정구역인 류큐 번으로 지정하였습니다. 류큐족과 중국의 반발을 최소화하기 위해 실시된 이런 점진적 통합정책은 향후 류큐섬의 지배권을 빼앗아 일본에 귀속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1875년 일본은 류큐인들이 중국과의 관계를 지속할 수 없도록 만들었고, 세력이 약해진 중국은 이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원주민들은 거의 20년 동안 일본의 강제병합에 저항했습니다. 그러나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중국은 류큐섬에 대한 모든 권한을 포기하였습니다. 메이지 시대에 홋카이도의 아이누족과 마찬가지로 류큐족도 일본의 강제동화 정책으로 고유의 문화, 전통 및 언어를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1880년대 이후로 학교에서 류큐 스타일의 복장, 헤어스타일 등을 금지 당했고, 학생들은 일본 의복을 입고, 일본어 사용을 강요받았습니다. 이런 군국주의적 발상과 천황 중심의 이데올로기는 초등학교부터 세뇌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1895년 일본이 대만을 합병한 후 오키나와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면서 소테츠 지옥이라 알려진 기근 기간이 발생했습니다. 1920년과 1921년 사이에 설탕 가격이 하락하고 대만에서 일본 설탕의 대부분을 생산하면서 류큐는 가장 가난한 현이 되었습니다. 설탕 가격의 하락으로 인한 경제적인 영향은 1931년까지 지속되어 인구의 약 15%가 외부로 이주하였습니다.